토스카나
폼베이(Pompeii)와 베수비우스(Vesuvius)산 등정 - 2019.9.29(일)
(1) 폼베이
폼베이는 약 20여년전 아내와 같이 국내여행사의 이탈리아 투어를 갔다가 잠깐 들린 적이 있었으므로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발칸클럽에서 2013년(5/24~6/7)에서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을 중심으로 지중해 크루즈여행(참석자: 김종욱, 김종훈, 원대연, 이노창, 이태용, 신필렬, 민남규, 정준명 회원과 2명의 게스트 부부 / 20명 + 크루즈월드 백지선 실장)을 하였었다.
그 당시 터키를 거쳐 그리스의 로도스섬, 산토니섬, 크레타섬과 그리스 아르고스톨리(Argostoli)를 거쳐 이태리의 시칠리섬까지 아름다운 섬과 지중해여행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시칠리 여행 후 이태리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아말피(Amalfi)에서 1박을 하게 계획되었는데 태풍이 불어 크루즈선이 아말피를 갈 수 없다고 선장이 결정하여 아쉽게 아말피를 볼 기회가 없었다. 나도 언젠가는 아말피를 비롯해 이태리 남부 지역을 찬찬히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대연 회장님이 본 여행팀에 앞서 선발대로 희망하는 사람만 아팔피 지역을 가보자 제안하셨다. 희망자를 모은 결과 다섯 커플(김종욱, 김종창, 김종훈, 원대연, 전금홍)이 화답하여 선발대로 2019년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3박 4일간 그림 같은 이태리 남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정작 이 안을 강력히 추진했던 원회장님이 개인 사정으로 사모님이 막판에 못 가시게 되어 원회장님은 선발대와 본진 여행을 싱글로 하시게 되어 아쉬웠다.
나폴리 지역은 이전에 두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아말피와 포지타노는 처음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절경을 차를 타고 즐겼고 포지타노에서 도보로 해변으로 통하는 상점가를 구경하고 맛있는 본토 음식을 해변이 코앞인 유명레스토랑에서 좋은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어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배를 타고 바라본 포지타노와 아말피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폼베이 지역은 여행계획이 하루 전일이 배정되어 오전에 폼베이 시가지를 보고 오후에는 폼베이시를 순식간에 망하게 한 베수비어스산을 등정하여 분화구 위까지 가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한국 투어팀은 일정상 베수비어스산을 가보지 못하는데 우리는 맵헤드(Maphead)여행사 이현동 사장님이 일정을 잘 짜주셔서 폼베이 최후의 날의 현장을 답사하고 화산폭발이 얼마나 무섭고 위력이 대단한지 간접적으로 체험하였다.
폼베이 최후의 날인 지금부터 약 2,000여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에 그 당시 시 전체 인구 약 20,000명의 약 10%인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사전 징후를 감지하고 도피하여 생명을 구한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한다. 2,000여명의 사망원인은 화산폭발로 뜨거운 용암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고 첫째는 건물이 무너져 깔려 죽은 경우, 둘째로 화산재가 폐에 차서 죽은 경우, 셋째는 화산가스에 질식하여 죽은 경우로 추정하고 있다. 폼베이의 면적은 66헥타르(약 20만평)와 둘레가 3200m정도 되는데 화산폭발이 3일간 계속되면서 주변도시와 함께 죽음의 재가 5~6m높이로 완전히 도시가 덮어 버렸다. 폼베이 역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도시를 건설하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몇 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기원전 310년에 로마가 정복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수준 높은 도시가 되었다.
폼베이는 교통의 요지여서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였고 로마 귀족들의 별장이 많았으며 로마 문명을 제대로 접목한 남부의 휴양도시로 발전하였다.
화산 폭발 후 오랫동안 화산재에 묻혀 1600여년간 묻혀 지내다가 1594년에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왕명을 받은 고고학자인 주세페 피오렐리에 의해서 조직적인 발굴이 되었다.
폼베이는 땅속에 묻혀서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다가 발굴된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2,000여년의 건물, 각종 유물, 죽은 사람들의 옷과 생활도구, 완벽에 가깝게 보존된 프레스코 벽화 등을 통하여 인류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의 보고로서 남아있다.
우리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시가지 인근에 있는 신비의 별장(Villa dei Misteri)는 매우 호화로운 대규모 저택이며 수많은 벽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고대의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2,000년 전 로마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우리 일행은 짧은 일정 때문에 폼페이 시가지 중 입구에 있는 몇 가지 시설들을 간단히 돌아보는데 만족해야 했다.매표소를 지나 포르타 마리나(Porta Marina)를 통해 2,000년 전 도시를 들어서 바실리카(공회당)을 거쳐 폼페이 중심인 프룸을 중심으로 주변 몇 군데 시설을 견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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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별장: 벽화의 일부분. 신비의 별장은 고대의 가장 중요한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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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2년의 지진이 일어나기 전 폼베이 중심지 포럼에서 바라본 제우스 신전이 있는 전망. 뒤에는 베수비어스산이 보인다.
양측면: 제르마니코와 티베리오의 개선문, 로마인들이 개축하고 있었던 2층으로 된 회랑.
왼쪽의 회랑 앞: 폼페이의 일등시민의 석상과 연설가들이 대중에게 연설을 하던 대형의 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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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적지의 위치가 지적된 공회장 지역을 상공에서 본 전경.
A) 에딜레스-행정사무실
B) 바질리카-공회당
C) 쿠리아 - 시 의회
D) 두움비리 - 시 정부
E) 에우마키아 건물 - 포목시장
M) 마첼룸 - 식료품 시장
T) 테르메 - 공중목욕탕
TA) 아폴로 신전
TC) 아우구스토 신전
TG) 제우스 신전
TL) 라리 성전 - 가정의 수호신을 모시는곳
TV) 베스파지아노 신전
1) 공회당의 법정
2) 공회당에서 공회장으로 들어가는 회장
3) 산니타족이 만든 공회당의 회랑
4,5,6,7) 황제 가족의 석상: 클라우디오, 아우구스토, 아그리피나, 네로
8) 코미찌오 ? 선거관리국
9) 로마인이 만든 공회당의 회랑
10) 경매대
11) “황제와의 협약”(Concordia Augusta 콩코르디아 아우구스타) 석상이 있는 에우마키아 건물의 후진
12) 에우마키아 여사제의 석상
13)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14) 멧돼지의 집
15) 베스파지아노 신전의 제물대
16) 환전소와 마첼룸(식품시장)
17) 12개의 기둥 위에 올려진 돔 천장이 있는 수조
18) 황제 가족의 석상
19) 어물전
20) 로마의 삼신인 제우스, 헤라, 미네르바를 모신 聖室
21) 칼리 골라 개선문
22) 티베리오 개선문
23) 제르마니코 개선문
24) 공회장의 공중변소
25) 포품 올리토리움 - 곡물 시장 (현재 발굴물의 보관소로 사용)
26) 멘사 폰데라리아-도량 측정소
27) 숫제스툼-연설장
28) 도리아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으로 2층으로 올려진 로마 공회장의 회랑
29) 활 쏘는 아폴로
30) 메르쿠리오의 헤르메스 주상
31) 공화정 시대의 제단
32) 해시계가 달린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
33) 활 쏘는 다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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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타 마리나 성문
2. 포룸
3. 유피테르 신전
4. 바실리카 (공회당 )
5. 아폴로 신전
6.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신전
7. 에우마키아(직물염색가공업자 조합)
8. 관청
9. 포룸 목욕장
10. 비극시인의 집
11. 벳티 가문의 집
12. 창녀집
13. 스타비아 목욕장
14. 소극장 오데온
15. 대극장
16. 검투사 숙소( 원래는 극장 휴게공간 )
17. 풍요의 거리
18. 원형경기장
19. 대운동장
20. 미발굴지역
도시는 두 개의 메인 도로 축과 교차하는 많은 소도로로 구성된 격자무늬의 가로망을 가지고 있어 마차가 직접 집 앞까지 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메인 도로는 마찻길과 인도로 분리되어 돌로 포장되어 있고 도로 레벨이 지반보다 낮아서 비올 때를 대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징검다리 석이 놓여있다. 주요 관람 건물로는 일부 기둥만 남아있는 제우스 신전과 아폴로 신전, 포르투나 아우구스타의 신전 등을 잠깐 살펴보았고 포럼 목욕장을 들어가 당시 목욕 문화를 세밀히 살펴보았는데 워낙 인파가 붐벼 관람이 힘들 정도였다. 목욕장은 남여탕이 구분되어 있고 탈의실, 냉탕, 미온탕, 온탕, 목욕장 등이 따로 구획되어 있고 별도 체육관이 있다. 건물 천정을 여러 군데 구멍을 내서 자연채광으로 조명을 했고 회당 천장과 목욕장 등에는 조각을 한 석재판으로 장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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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노(목신)의 집은 고대가 남긴 가장 전형적인 저택(domus)이며 4면이 도로에 접해있는 대 저택이다. 이 저택에는 정원회당과 블루 칼라의 대리석으로 만든 춤추는 목신의 상이 있고 집 후면에는 대정원이 있다.
두 정원 사이에는 페르시아의 마리오 왕을 맞서 싸우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모자이크 그림이 바닥에 있는데 현지의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방문지는 창녀의 집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흥미로운 장소이며 크지 않은 집인데 실내 벽 상단에는 각종 체위가 그려져 있어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메인 스트리트 한 곳에는 창녀의 집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인도의 돌에 새겨져 있어 흥미로웠다. 폼페이시 끝단에는 기원전 80-70년 사이 건립된 원형 극장이 있는데 가보지는 못했고, 대략 1만 2,000명에서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한다. 이 극장의 규모를 보면 도시의 인구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이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원형극장이라 한다.
폼페이는 약 20,000명이 거주했던 인구 밀집 지역이고, 공공 목욕장이 여러 군데 있어서 물 수요가 많았고 로마 사람들은 목욕문화가 발달하여 유럽이나 북아프리카, 중동 등 로마 유적에는 빠짐없이 공공목욕탕이 있으며 영국의 바스는 아예 도시 이름이 목욕을 상징하고 있고 역시 유명한 로마 유적지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공공 목욕장에서는 부자들과 같이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폼페이는 원래 우물과 인근의 사르노 강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공공 목욕탕 등 물의 수요가 증가하여 수로를 통하여 외부에서 물을 끌어오고 이 물이 목욕탕이나 공동 샘터로 배수되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직접 집안으로 수도관을 연결하여 사용하였으나 당시 수도관을 납으로 만든 Pipe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납 중독이 많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폼페이는 아직도 25% 정도가 미발굴지역으로 남아있고 아직도 미완의 도시이다. 발굴된 유적들도 대부분 붕괴되었고 기둥이나 벽 등만 남아있고 지붕이 남아 있는 시설은 극히 일부이다. 마치 거대한 폐허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전술한대로 2,000년 전 건축, 도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건축물의 수준은 매우 높으며 그 당시 생활 수준도 로마 귀족들의 별장 도시답게 풍요가 넘쳐난다. 도시도 여러 세기 동안 다른 문명에 의해서 건설되었지만 도로망과 공공시설들이 주거와 잘 어울려있는 도시이다. 이번 여행에서 폼페이를 재발견한 것이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2) 베스비우스(Vesuvius) 화산 등정
베스비우스 산 가는 도중 나폴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현지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 자리를 하고 아주 경제적인 가격으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아주 횡재한 느낌이었다. 식당 이름이 특이하게 EDEN이었다. 여기가 에덴동산이란 말인가?
베스비우스 화산은 나폴리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낙타 등 모양의 두 봉우리를 가졌다. 큰 봉우리가 그란코노(Gran Cono)이고 작은 봉우리가 소마(Somma)산이다. 큰 봉우리에 화산분화구인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이 봉우리 높이는 현재 1,281m이나 한 때는 2,000m 높이였다고 한다. 화산의 분출은 약 17,00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그란코노는 79번 화산이 폭발했고 가장 최근에는 1944년에 분출된 활화산이다. 폼페이 멸망은 AD 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 산 분화로 인근 도시인 헤르쿨라네움과 함께 화산재에 묻혀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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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구 정상과 나폴리 시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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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구 내부 사진
차를 타고 산을 향해 가는 길에 도처에 마그마가 흐른 흔적을 볼 수 있었고 폼페이를 집어삼킨 화산을 등정한다는 설레임과 호기심으로 차창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하나의 씬도 안 놓치려고 열중하였다.
오후 3시 10분경 분화구 정상을 향해 도보로 일행과 함께 매표소를 통과하였다. 등정길은 약 10° ~ 15° 정도의 경사로 제법 넒은 길(약 3~5m)을 만들고 비포장이지만 표면 관리를 잘해서 편하게 등정할 수 있었다. 특별한 장비나 준비 없이 편한 복장으로 등정을 하고 있었고 간간히 어린 아이들도 보였다.
보도 양 쪽은 목재로 안전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고 날은 흐려서 등산하기에는 알맞은 날씨였다. 분화구 정상까지는 사진도 찍으면서 쉬엄쉬엄 갔으나 약 40분 정도 걸렸다. 분화구 정상에 가는 길은 나무 계단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고 정상 부근에는 매점과 쉼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1800년대에는 산 밑에서 정상까지 funicular(산악용 모노레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었고 콘크리트 기초나 cable 등 흔적만 남아있다.
분화구 크레타 직경은 약 500m의 원형이며 깊이는 250m 정도이다. 1900년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분화구 밑까지 내려가서 기기묘묘하게 굳어진 용암과 분출 현장을 살펴보았는데 지금은 워낙 사람이 많이 오고 있어서인지 내려가지 못하게 막아두었다. 분화구 내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오르고 있어 활화산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매표소 인근 매점에서 베스비우스 화산에 관한 영어 책을 한 권 샀는데, 매우 흥미로운 사진과 함께 화산 폭발의 역사, 분화구 등정, 역사 등 흥미로운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베스비우스 화산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거의 가보지 못하는 베스비우스 산 등정은 이번 이태리 여행에서 오래 기억될 경험이 될 것이다. 참고로 구글에서 검색한 폼페이 개황과 베스비우스 산에 관한 Wikipedia 자료를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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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화산폭팔시 사진. 미국 전투기가 정찰하고 있다.
▣ 폼베이
폼페이({{llang|it|Pompeii})는 고대 로마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 인근으로,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 분화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 등과 함께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되었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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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79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영향권:
검은색 구름은 화산재와 분석(噴石)의 분포지를 나타낸다. 폼페이(Pompeii)와 다른 도시들이 영향권에 들어 있다.
폼페이 발굴
폼페이 발굴은 1592년 수로공사 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748년 발굴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3분의 2가 발굴되었다. 작업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 등 수준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1월 6일, ‘검투사의 집‘이 폭우로 인해 붕괴되었다.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小)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제독으로 군함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4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후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최후는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멸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서 약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상가,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_baths)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화산 폭발 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 및 재건에 손도 못 댔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위치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 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인구 2만 5,081명[1991])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있으며,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 베수비오 산
베수비오 산(이탈리아어: Monte Vesuvio, 라틴어: Mons Vesuvius)은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에 있는 화산이다. 화구를 중심으로 화산쇄설물이 원뿔모양으로 쌓인 성층화산으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지난 1백년 동안 유럽 본토(섬 제외)에서 유일하게 화산 활동이 있었던 화산이기도 하다. 1944년 분출을 끝으로 현재는 분출을 멈춘 상태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나폴리에서 6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나폴리 만과 가깝다. 나폴리와 함께 바다에서 바라본 나폴리 만의 전경을 이룬다. 79년에 있었던 화산 활동으로 로마 제국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파괴된 것으로 유명하다. 베수비오 화산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분출이 있었으며 오늘날은 인근의 인구가 3백만 명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의 하나로 여긴다.
베수비오 화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의 활동 무대 중 한 곳이다. 이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에서는 베수비오 화산 아래 건설한 도시 이름을 헤르쿨라네움이라 하였다.
베수비오 화산은 낙타등 모양의 두 봉우리를 가졌다. 그란 코노(Gran Cono) 봉우리에는 오랜 화산 분화구에 칼데라가 생성됐다. 이로 미루어 보아 베수비오 화산은 원래 지금보다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은 봉우리는 소마 산(이탈리아어: Monte Somma)이라 부른다. 이 둘을 합쳐 베수비오-소마 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수비오 화산의 분출은 약 17,000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후 주봉인 그란 코노는 79번 분출했다. 주봉우리 높이는 1,281 m이며 소마 산은 1,149 m이다. 두 봉우리 사이에 5 km 길이의 아트리오 디 카발로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산 경사면은 용암이 흐르다 굳은 용암지대이며 수풀이 무성하다. 정상 부근은 황량하나 산기슭에는 포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베수비오 화산은 지금은 분출하지는 않으나 여전히 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활화산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의 수렴 경계면에 있는 성층화산이다. 아프리카 판이 유럽판 밑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화산 활동의 원동력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용암대지는 안산암과 함께 스코리아, 화산재, 부석 등으로 이뤄져 있다.
베수비오 화산은 약 17,000년 전 화산 활동을 시작한 이래 여러 차례 분출하였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파괴한 79년의 분출과 청동기 시대의 인간 발자국을 남긴 아벨리노 분출이 유명하다.
▣ 참고서적
① 정태남 저, 이탈리아 도시기행, 21세기 북스
② 폼베이 오늘과 2000년전의 모습, 여행안내 책자, 보네키 출판
③ VESUVIUS, History of the Volcano & It`s Eruptions, Edizioni Kina Italia / LEGO

